2017/교양_에세이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사고와 표현 1번째, 2017-2); 이것이 인간인가

170841 2021. 5. 25. 19:37

 

 

이것이 인간인가

아우슈비츠를 통해 인간성의 한계를 성찰한 현대증언문학의 고전!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화학자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유대계 이탈리아인인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book.naver.com

 

 

   사람의 본성을 말하는 일은 성선설, 성악설 및 여러 가설로 예부터 논란이 되어 왔고, 아직도 답을 보일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가설이 성립한다고 믿어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인간’의 삶을 한 ‘종류’의 인간으로서 바라본 모습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 중 중요한 것은 인간은 지혜를 갖고 생각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 믿는 사람의 눈으로는 지금과 같은 ‘평범한’ 생활을 겪어도 많은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상상조차 어려울 정도로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이 탄압되었을 때 많은 인간이 느끼는 주관적 감정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행동 및 변화를 보았다. 이에 대한 충격과, 그 충격을 느낄 새도 없이 자신의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들과 생각은 그것이 끝나고도 길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 생활과 자신의 ‘평범한’ 생활을 비교하며 철학적인 접근 역시 남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책의 저자는 그 다양한 ‘인간의 삶’과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의 삶’ 사이에서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특권층’에 대개는 비유대인이 많았다지만, 그에 속하는 유대인을 평가할 때 ‘아주 생존력이 강하고 잔혹한’이라고 평가했다. 친일파를 보던 그 시대 우리 조상들의 눈길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특권층’은 독일인에게는 당연히 자신보다 낮은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사실 그 ‘특권’이랄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화장실을 따로 쓰거나, 어려운 노역만 피하는 등, 생각보다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는 예전 소련으로 잡혀 온 사람들이 공산주의로 많이 변절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 공산주의로의 변절로 얻어낸 것은 사소한 보상이었기에, 자신은 원래 공산주의자였다고 자신을 소위 말해 ‘정신 승리’한 것이다.

 

   ‘필요 없는 인간’이라는 판단이 내려지면 가차 없이 가스실로 보내진단 사실을 알았지만,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신경 쓸 시간이 없는 듯했다. 그것을 화자는 ‘지금의 급한 배고픔 등의 욕구’ 때문에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기본적인 욕구와 불안함만 남은 상태’의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책의 저자인 프리모 레비가 느낀 ‘인간의 삶’과는 적어도 조금의 괴리감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모든 물품들을 말아 베개 모양으로 만들어 베고 자야만 했다.’

 

는 것과 ‘나의 높은 번호를 보고 고참들은 비웃었다.’ 등의 구절에서 그 옆에 있는 인간조차 믿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카베에서 나왔을 때 친구인 ‘알베르토’와 같은 구역에 배정받았음에 좋아하는 것은 어떠한 모순이 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걸까, 이런 모순은 지금도 존재하지 않나? 지금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을 절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외로움에 괴로워한다.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자신의 생각으로 옭아매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자유를 탄압받았을 때의 인간의 삶은 언제보다 추악하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분노에 차 적어내는 화자의 글에는 어찌 보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는 자유 국가에 살고 있다가 탄압을 받았고, 또 다시 자유 국가에서 살았다. 쉽게 적응하기 어려운 변화를 빠르게 겪어 낸 사람이다. 그런 변화가 없이 자유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를 보장받고 있을까?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책의 저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인간의 삶’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프리모 레비는 자살을 했다. 작품 해설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온 사람이 자살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프리모 레비의 자살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그의 저작을 통해 아우슈비츠에서 파괴된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는 일에 몰두했던 그가 왜 자살을 하였을까? '마음속에서 황폐한 슬픔이 점점 자라난다.' 프리모 레비가 이 책을 통해 보낸 메시지 중 하나이다. 혹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자살하는 일을 드물지 않은 일이라고 했던 위의 글을 기억하는가? 아마도 '그렇구나.'라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 힘든 일을 겪고, 끈질기게도 수용소 안에서는 치욕을 보더라도 살고자 했던 그 사람들이, 그 누구도 치욕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것일까?

 

‘점점 젊은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 과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를 시작으로 ‘휴전’, ‘주기율표’, ‘지금이 아니면 언제?’ 등의 글을 썼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그가 자살하기 전 썼던 글인 '결론'에서 밝힌 입장이다. 지금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옛날 사람들’과 ‘꼰대’ 취급을 분명 프리모 레비도 알게 모르게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언제 다시 반복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그런 모습은 큰 안전 불감증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들은 삶을 영위하고 있고, '문화적인 인간', '잘 살자!'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며 삶의 의미를 찾길 원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중 '아이 캔 스피크'라는 영화가 있다. 그 이전에는 '귀향'이라는 영화가 있었고, 어쩌면 이 영화가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거의 최초의 영화나 다름이 없다. 그 전에도 있었을 수도 있지만, 꽤 그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다고 생각하는 필자로서 모른다는 것은 대부분의 대중이 모르는 영화이고, 사회적으로 변화를 일으킬 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위안부의 일이 발생한 지는, 정확히 그분들이 그것을 겪은 지 몇십 년이 흐르도록 침묵하고 있다가 갑자기 입을 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서야 알고 분노하는 대중 때문이다. 몰랐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삶'이란 것은 단순히 '배고프고 등 추운 일 없이 살아간다.'의 의미가 절대 아니다. 책의 저자인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에 있으면서 힘든 일들만 계속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비롯하여 많은 수용소에 있던 유대인 및 여러 포로들은 죽음을 두려워했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죽지 않길 바랐다. 적어도 수용소에서는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곳을 나왔을 때 그들을 반기는 것은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라며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는 젊은이들과 행복한 사람들뿐이었다.

 

   전쟁을 한 번 겪은 사람은 정신병을 평생 안고 살아가며, 조금의 큰 소리라도 난다면 크게 놀란다고 한다. 문제는 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겪지 못한 사람이 겪은 사람만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겪지 못한 사람이 그 일을 겪은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친일파 청산을 않는 정부를 욕하면서도 정작 그 일로 뉴스가 뜨지 않으면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것이 연상되지 않는가? 심지어는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도 비록 소수의 의견이지만 나온다. 백 년이 채 지나지 않은 이야기이고, 언제 다시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에이, 설마?’라는 생각으로 넘긴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평범한’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 또 다른 어떤 생활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인 이야기나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어른들이 늘어놓으면 ‘고리타분한 이야기’ 및 ‘너무 옛날이다.’라며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인 것이 당연한 이야기가 되었고, 그런 생활에 익숙하다. 이 책의 저자는 아우슈비츠에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고, 자유를 탄압당했다. 우리들의 육체는 분명 편하지만, 책의 저자가 말하는 ‘인간의 삶’을 사는 것처럼 자유를 보장받고 있을까?

 

   ‘자본주의의 노예’라는 말이 당연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사람의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며 시위하고 있는 모습이 빈번하고, 그런 시위조차도 일어나지 않고 모두가 쉬쉬하며 넘어가기도 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만들어진 이유도 자본주의와 직결되어 있다. 1차 산업혁명의 ‘대량 생산, 대량 소비’에서 ‘대량 소비’가 이뤄지지 않으면 산업혁명이 완성될 수 없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하여 산업혁명이 늦게 시작되었고, 따라서 식민지 국가를 만들 수 없었다. 독일에서의 내수로는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공산품들을 소비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에 따른 불만이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를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들의 목숨이 사라지며 만들어진 고무 공장에서는 단 1kg의 고무도 생산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미 충분한 설비가 있었고, 더 이상의 고무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많이 생산되어 있는 공산품을 소비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전쟁이었고, 그 포로들에게 끊임없이 또 다른 일을 시켜야 했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을 알면서도 지었던 것이다. 그 재료인 시멘트나 재료들은 독일인 노동자와 자본가들이 만들어낸 공산품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여러 이유로 교체를 받았던 팬티, 숟가락 등 필요한 물품들 역시 똑같은 것이다.

 

   전쟁을 ‘필요악’처럼 이용하는 것은 절대 옳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그 수용소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알 방법도 없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를 만들어낸 것은 그 시대의 독일 국민이라는 말이 있다. 저 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독일인들의 머릿속에 전쟁은 자신의 ‘발전된’ 삶과 ‘인간의 평범한’ 삶을 유지시켜 주는 하나의 도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간의 삶’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그들에게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독일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분단도 되었지만 그들의 산업혁명은 완성될 수 있었다. 현재 독일은 유럽연합을 이끄는 수장 역할을 하고 있을 만큼 제일 발전된 국가 중 하나이다. 독일인들이 잘한 선택을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선택은 그 시대에서 당연한 하나의 수순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더 양분화가 심해지는 시점에서 노동자들의 ‘인간의 삶’이 파괴되고 있는 시점임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먹고살기가 바빠서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 시점에서 저자가 말하는 ‘인간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없을 뿐, 저자가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옛날에 비해 편해졌지.’

 

   틀린 말은 아니다. 단순한 쳇바퀴를 구르는 일에만 익숙해져 있다가 우울증에 걸려 죽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육체적인 고통이 주어지는 아우슈비츠에서는 살고 싶어 노력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나중에 자유로운 국가에 있을 때 자살을 하는 것과 비교된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이 그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모 레비의 자살은 아우슈비츠보다 ‘무관심’이 더 치명적이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자유’를 보장받으며, ‘인간의 삶’을 살고 있을까? 또 다른 아우슈비츠에 갇힌 것은 아닐까?

'2017 > 교양_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이방인'일까?(사고와 표현 2번째, 2017-2)  (0) 2021.05.25